'미필적 고의'라는 말이 있다. 작심하고 한건 아니나 부주의하였기 때문에 사고를 유발했고 거기에 책임이 있다는 뜻으로 대충 해석될 수 있다. 가령 주유소에서 담배 피워서 화재가 나는 사건 정도? (그니깐 부주의라고 하면 될거 같은데 뭐가 다른지는 잘 모르겠다.)
임성순 작가의 회사 3부작 중, 2권의 책의 주제는 명확하다. (나머지 한 권은 뭘 말하려는지 잘 모르겠다. 해석의 즐거음 따위 버린지 오래다... 솔직히 그런건 오덕들이나 하는거 아냐? 에바에서 서드 임팩트가 뭘 의미하냐... 매트릭스에서 빨간약의 의미는 뭐냐...)
'미필적 고의'
내가 무심코 바꾸는 핸드폰은 콩고의 내전을 촉발하고 고릴라의 멸종위기를 유발한다.
전세계에 식량은 이미 모든 인구가 소화할 양을 넘겼지만 매년 수천만명이 아사한다. 거기에 대해 우리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가?
'컨설턴트'에서 이 주제를 스토리와 잘 녹여내서 말한다면, '오히려 다정한 사람이 살고 있다.'에서는 훨씬 더 노골적으로 말한다. 소설 자체가 작심하고 아프리카의 현실을 말해주며 독자의 죄책감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쓰인 것 같다. 스토리나 등장인물은 오히려 말하고자 하는 팩트(소설의 내용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소설이 다큐가 아니므로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도 모르겠다.)에 대한 양념 혹은, 좀 덜 지루하게 설명하기 위한 장치인 느낌까지 든다.
'컨설턴트'와, '오히려 다정한 사람이 살고 있다' 에서는 주제의식뿐 아니라, 자기 표절이라 불릴 정도로 동일한 장면도 존재한다. 두 소설에서 주인공은 아프리카의 참상에 대해서 한국에서 편히 잘사는 '선량하면서도 평범한' 사람에게 이야기 하지만 그들은 관심도, 죄책감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은 '다정'하나 그들의 미필적 고의 아래 아프리카는 죽어간다.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처럼, 컨설턴트를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도 역시 책을 읽은 후에는 아프리카의 참상에 대해 거의 기억하지 못하거나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거다. 임성순 작가는 그게 열 받아서, '이것들이, 이래도 충격을 안 받아?' 하는 심정으로 이 소설을 쓴 것 같은 느낌까지 든다.
--- 스포 주의 ---
'컨설턴트'에서 주인공은 체념한다. '어쩔수 없자나'라는 심정으로 포기하면서 자기 삶을 지킨다. 그래... 어쩔 것인가? 아프리카가 아무리 참혹하더라도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가? 죄책감을 가지고 불편하게 살텐가? 망각 속에서 편히 살텐가? '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있다'의 주인공은 '컨설턴트'와는 다르게 그 짐을 놓지 못한다. 일반인 보다 훨씬 양심적이며 실천하는 지식인인 주인공들은 현실의 모순 속에 자신의 '실천' 때문에 오히려 더 깊은 죄악감을 느끼고 결국 거기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다. 두 주인공 중 한 명인 범준은 끝내 궤변에 가까운 논리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과거의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한 박신부는 무기력한 삶을 살다가 결국 범준에게 비참하게 희생된다.
결국, 더 양심적인 사람들은 더 괴롭고 비참한 운명을 지니게 되고, 모순의 배후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는 '회사'라 불리는 인간에 의해 구축된 시스템과, 그 시스템의 수혜자로 보호되는 '덜' 양심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더 편안하고 안락하게 누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신이든 인간이든 대다수의 '평범하고 양심있는' 사람들에 의해 '방관'된다. 소설은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저 아래의 원죄와도 같은 죄책감을 되새기게 한다. 아이폰 개발을 위해 중국의 아이들이 공장에서 희생된다는 등의 기사를 볼 때나 밥을 남기는 아이에게 지금도 굶는 사람이 있다는 아버지, 어머니의 흔한 훈계를 식당 한편에서 흘겨 들을 때 미세하게 진동되는 내 양심을 수면위로 끌어낸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컨설턴트'의 주인공처럼 어쩔 수 없다고 자위하거나 '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의 주인공들처럼 죄책감을 끌어안고 계속 지내는 것 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상당히' 불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