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안녕

사는 이야기 2009. 12. 7. 00:09

정리하자면, 나의 20대의 키워드는 '방황' 이라고 해야 겠다.

20살:

별 볼일 없던 내 10대에 내가 붙잡을 수 있었던 유일한 끈은 제도권 내의 내 성적이었다.
내 자존감과도 같던 그 끈의 경계선이었던 '연고대'를 그나마 겨우 맞출 수 있었다.

대학에 가면 뭔가 환상적인게 있겠지 하는 기대감은, 웃기게도 합격과 동시에 그 실체라는게
실재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감이 되어 내게 왔다.

그리고, 20살 내내 나는 지독한 열등감과 후회에 시달려야 했다. 서울대에 가지 못했다는 열등감.
더 좋은 과를 가지 못했다는 열패감. 재수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 하지만 무언가를 바꿀 용기를
가지지 못했다. 학부제 속에서 그나마 더 좋은 과를 선택하려면 재수 준비가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이
이유일 수 있겠으나, 실상 큰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연애를 하고 싶었으나 서툴렀고,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열망과 가지고 있던 열등감, 상대를 배려하지 못한 마음이 뭉쳐져 결국 마음에 상처만 남겼고, 아팠다. 마음의 확신도 없었지만 버려진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그 와중에도 난 내가 느끼는 감정을 인정할 수 없었다. 아마 그건, 역시나 내 자존감의 문제인 듯 했다.

전공에 대한 확신은 그해 비해 보다 확실했다. 컴퓨터 과목에 대한 성적은, 컴퓨터 특기생으로 뽑힌 아이들을 빼면 거의 탑이었고, 재밌었다. 코딩은 즐거웠고 어려워 하는 아이들을 이해하기 힘들 정도였다.

21살:

이상하게 21살이 주는 이미지는 좋다. 그러나 실상 내가 21살에 무엇을 했는지는 크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역시나 다시한번 서투르게 연애를 해야만 했고, 결과는 좋지 않았다. 21살은 그냥.... 큰 기억은 없지만, 그래도 21살이라는 이유로 소중했던것 같다.

22살~24살:

아마 20대 내 인생의 전성기라 할 부분일 것이다. 월드컵이 있던 그 해에 난 좋았다. 생활에 만족했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휴학을 했다. 휴학기간에는 너무 좋았다. 달리 배운것도, 한 일도 없지만, 규칙적으로 "노는" 그 생활이 만족 스러웠다. 군대에 가기 전이라 아무 부담없이 쉬었었던 걸까. 결과적으로 군대도 안가게 되었지만....

복학을 하고 나서도 좋았다. 전공에 대해 자유롭게, 성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발전하기 위해 공부했고 정말 즐거웠다. 복학 후, 성적 역시 좋았다. 장학금을 탈 정도로 학업은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첫사랑을 만났다.

첫사랑은 과 동기었다. 1학년 때부터 호감을 가져온 내 동기. 선배와 사귀고 있었고, 내 친구도 좋아했었기에 쉽게 마음을 접었었다. 나에겐 관계를 해치면서 여자를 쟁취할 용기와 필요가 없었다. 그 당시에는...

복학 후, 수업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친해졌고, 그 와중에 그 아이는 선배와 헤어졌다. 그리고 난 그 아이를 다시 한 번 좋아했다. 섣부른 연애만이 있었던 과거에 비해, 이 번 연애는 오래되었고, 행복했고, 돌이켜 보면 사랑했다.
사귀는 내내 사랑을 의심하였지만, 그건 분명 사랑이었다. 이상은의 '언젠가는' 노래가사처럼.
여자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어 언제나 서투르기만 했던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사랑해 주었다. 선배의 애인었던 그 애 였기에 연애는 비밀 연애였고, 그 덕분에 나는 친했던 과 동기와 사이도 결국 어색해 졌지만, 후회는 전혀 없었다.

그 애는, 처음으로 나의 존재 그 자체를 사랑해 주었다. 나의 결점과 장점 모두를 싸그리 사랑해 주었고, 그래서 너무 고맙다. 너무 어린 나이에 만난게 아쉬울 만큼.

25살~26살:

대학원에 들어오면서 난 인생의 최대 암흑기를 만나게 된다. 이 시절 나는 정말 괴로웠고 힘들었으며, 힘들었고 괴로웠다. 현실과 이익, 손해는 결코 내가 넘지 못하는 바운더리다. 장학금을 탈 수 있다는 이유와, 학부 시절 1등을 놓치지 않은 과목이었기에 선택한 자연어처리라는 학문은,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대학원에 들어가보니, 이건 뭐... 잘 팔린다는 컴퓨터 전공 내의 완전 순수과학이었다. 박사 형들은 학부생들은 너무 쉽게 턱턱 붙고, 붙어도 잘 안가는 회사에서도 떨어지기 일수였고, 탁 보기에도 맘에 안드는 중소기업이나 취직해서 고생하고 있었다.
따라서.. 전혀 학업에 취미가 생기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전혀 재밌지 않았다. 처음 들어왔을 때, 교수님이 내게 걸던 기대는 완전회수 되었고, 졸업할 때가 되어 나의 게으름은 입학 때 받던 대접을 180도 바뀌어 놓았다.
좌절은 계속 되었고, 군대 대신 선택해야할 전문연구요원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이 때 처음으로, 지적인 부분에서도 실패를 하였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지고 있던 자존감은 여지없이 무너졌고, 힘들었다. 첫사랑은 그 와중에 떠났고, 이상하게도 난 해방감을 느꼈다.

돌이켜 보면, 그 때 내가 가지고 있던 가장 소중했던 두 가지를 잃었던 시기였다.

27살~28살:

26살 끝자락, 걱정했던 것과 달리 취직은 너무나 순조로웠다. 지원했던 거의 모든 기업에 합격하였고, 그 결과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절대 가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던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 합격하였다. 것도 극적으로. 다른 합격자 보다 훨씬 힘들게, 하지만 그래서 훨씬 떳떳하게... 모두가 부러워하는 직장에 다니게 되었고, 처음으로 서울이 아닌 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두번째 연애를 시작하였다. 26살 막판에 시작한 스윙 댄스 동호회에서 만난 아이었다. 많은 면에서 첫번째 연인과는 달랐다. 많이 좋아하고, 많이 날 좋아해주었지만, 나랑은 많은 면에서 맞지 않았다. 그 차이는 메꿀 수 없었고 결국 1년을 조금 넘기고 헤어졌다.

28살이 되면서, 대전에서 좀더 많은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주말마다 올라갔지만, 여기서 스윙 활동을 다시 시작하면서, 대전에서도 친구도 생기고 데이트도 하곤 하였다.

29살:

28살 마지막에, 스윙댄스 실력을 좀 더 향상시키기 위해 서울에 있는 동호회에 가입을 했다. 친구가 다니는 동호회 파티에 우연히 갔다가 즉흥적으로 가입을 하게 되었다. 그런 우연이 내 마지막 20대를 완전히 채워 버렸다.

주말마다 빠짐 없이 서울의 스윙동호회에 나가게 되었고, 그 생활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한 아이를 좋아했다. 짝사랑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는데, 실컷 짝사랑을 하게 되었다. 웃기게도. 서른 다되어서.

연애를 시작하는 데 있어서만은 실패를 해본적이 별로 없었기에 처음 좋아할 때는 많은 것을 꿈꿨고, 기대했고, 설레였다. 하지만, 결국 생채기만 잔뜩 남았다. 여전히 나는 서툴렀고, 상대방의 마음을 얻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내 맘을 정리하지도, 결판 짓지도 못하였다. 처음으로 연애 상담이란 걸 친구와 했고, 처음으로 잠을 설치며 가슴 졸였고, 아무리 해도 얻을 수 없던 마음에 절망했다.

결국, 한참이 지나서야, 감정의 특별함이 상호간의 것이 아니라 나의 일방적임 것임을 인정할 수 있었다. 헛된 희망과 감정이 아직도 내 마음에 부질없이 공회전 하지만....

그렇게, 많은 아쉼을 남기며 나의 20대는 끝났다.

아쉬움이 있어서, 그래서 안타깝게... 후회가 있게...

Posted by 오캄스레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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